2016. 5. 19. 20:11

이게 웬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무심코 B tv를 틀었다가 이도저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소문의 그 드라마, <랑야방: 권력의 기록>을 보고 만 것이다. 중국 드라마는 유치하고 과장됐다고 여겼다. 현대극은 촌스럽고, 시대극은 지루하리라 짐작했다. 중화권 미남은 느끼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랑야방: 권력의 기록>은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와장창 깨부쉈다. 비주얼은 고풍스러웠고, 플롯은 섬세하고 치밀했다. 종주님과 정왕 전하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랑야방: 권력의 기록> 시청과 동시에 찾아온 중드홀릭의 전말을 공개한다. B tv가 중드 마니아를 위한 천국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을 당신을 위해.

글 – 윤혜지 (씨네 21)



#종주님 오 나의 종주님

<랑야방: 권력의 기록>(이하 <랑야방>)은 수수께끼의 책사 매장소(호가)가 수도 금릉으로 건너와 황제의 눈 밖에 난 7황자 정왕 소경염(왕개)을 황제로 옹립한다는 내용의 정치 시대극이다. 천하에 모르는 일이 없다는 랑야각은 의술과 무공에 뛰어난 린신(근동)이 지배하는 강호의 정보수집 기관으로 해마다 나름의 기준을 두고 재능 있는 자들을 분류해 목록을 작성한다.


 황위를 놓고 겨루는 태자 소경선(고흠)과 5황자 예왕 소경환(황유 덕)은 매장소를 자신의 책사로 데려오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고, 매장소는 손안에서 그들을 쥐락펴락하며 뒤로는 변방의 정왕에게 충성한다. 매장소는 칼을 든 무장들 사이에 혈혈단신으로 나타나 몇 마디로 상황을 제압하고는 위기에 처한 한 가족을 구해주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강호를 호령하는 강 좌맹의 종주라는 그는 무공은 커녕 약간의 추위조차 못 견디는 병약하기 짝이 없는 남자다. 화로와 손 난로, 털망토를 늘 곁에 두고 살아야 남들처럼 앉아라도 있는 정도다. 


강호를 지배하며 편안히 살아도 될 그가 금릉의 황권 다툼에 굳이 끼어드는 이유는 과거의 원한 때문이다. 매장소의 진짜 이름은 임수. 13년 전, 1황자 기왕을 모시던 적염군의 장수였다. 적염군은 황제를 위해 외세와 전투를 벌이던 중 난데 없이 역도로 몰려 몰살당한다. 세간에는 임수도 그때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성품이 올곧은 정왕은 임수의 소꿉친구이자 과거 기왕 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을 만한 인물이다. 매장소는 정왕부에 힘을 실어 기왕과 적염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책사 매장소로 살아간다. (세상에 이렇게나 사연 있는 남자가…! )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몇 편을 더 봤다. 비극적인 과거사를 품은 병약한 매장소가 저 음험한 세계에서 얼마나 버틸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뜻밖에도 매장소는 몸만 허약할 뿐 입만 열었다 하면 독설을 퍼붓고 당한 건 배로 갚아주고 마는 대찬 성격의 소유자였다. (…매력적이야.) 다음날도 꼼짝하지 않고 <랑야방>을 봤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날도 그랬다. 속으로 “종주님!”을 부르 짖으며 54부에 이르는 매장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나보다 훨씬 앞서 <랑야방>에 입덕한 천계영 작가는 트위터에 <랑 야방>이 “사람의 감정을 온통 휘저어놓는데 그 방식 이 너무나 세련되고 깊어서 계속 감탄하며 보게 된다”는 멘션을 올렸다. 요새 가장 행복 할 때는 “<랑야방> 54회를 보자마자 바로 다시 1화를 클릭할 때”라고 했다.



#중국이 자랑하는 2015년 올해의 드라마

<랑야방>은 중국 드라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여유로운 자본으로부터 나 오는 시각적 스펙터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액션과 전투 신들,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촬영, 치밀한 플롯까지 제대로 갖춘 기품 있는 고전극이었다. 현지에서 방영될 당시도 아이치이, 유쿠, 토 도우 등의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평균 시청점유율 90%를 기록한 화제작이었고, 중국의 유력 시사지 <신주간>은 지난해 ‘2015 올 해의 드라마’로 <랑야방>을, ‘올해의 배우’로 호가와 왕개를 선정했다. 


호가야 원래 ‘고전극 남신’으로 유명했지만, 10년간 무명이었던 왕개는 <랑야방>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제작자 후홍량이 자신의 제작사 동양정우양광영시에서 만든 첫 작품이자 첫 번째 시대극인 <랑야방>은 철저한 고증과 디테일 하에 만들어졌다. 가상의 양나라를 배경으로 했기에 딱히 고증을 토대로 시대를 세 심하게 재현할 필요가 없었지만 후홍량과 감독 공생·이설은 궁궐 내 법도, 지위에 따른 복식과 장식의 차이와 머리 모양, 인물 들의 행동 하나까지 철저히 중국의 고대 예법을 따랐다. 복식은 당나라 이전, 세트와 소품을 포함한 전체적인 미술은 송나라 이 전을 참고했다고 한다. 옷감과 색채에까지 구분을 두어 각 인물의 성격도 분명하게 살렸다. 


웹소설 시장이 발달한 중국에선 많은 드라마가 인기 웹소설을 각색해 제작된다. <랑야방>도 그러한데, 원작자 해연은 <랑야방>의 각본까지 도맡았다. 해연은 티도 안 나게 은근히 깔아둔 복선들을 아주 꼼꼼하게 회수하는데, 별 의미 없어 보였던 소품과 설정이 뒤에서 시의적절하게 활용될 때에야 비로소 복선들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심지어 유머러스 하기까지 하다. 매장소가 본래 성격을 드러낼 때, 매장소의 호위 무사 비류(오뢰)와 린신 각주가 아웅다웅할 때, 임수의 무술 스승이었던 금위군 통령몽지(진룡)가 눈치 없는 (없어도 너무 없는) 행동을 할 때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임수의 연인이었던 예황(류 도)은 10만 군대를 이끌며 어린 동생 대신 운남왕부를 대리청정하는 군주이자 강건한 무장이다. 황제 직속 수사대인 현경사의 수사관 하동(장령심) 역시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로 언제나 수사 관답게 냉철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캐릭터 설정이 강력해서만은 아니다. 평범한 궁녀나 시녀들도 각기 뚜렷한 목적과 주 관을 갖고 움직이며 후궁들도 전면에만 나서지 않을 뿐 어디서든 발 빼는 일 없이 치열하게 싸운다.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 고 있다”고 말하며 여권신장에 주력했던 마오쩌둥의 영향으로 현대 중국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상승했다. 양성평등한 사회라기엔 무리가 있지만, 최소한 중국 드라마 속의 여성 캐릭터들은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낸다.

메뉴위치 : 영화/시리즈 > 시리즈 > B tv 추천작



#배우 따라, 장르 따라, 흘러 흘러..

이제 <랑야방> 대신 다른 중드를 볼 때가 됐다. 응당 <위장자: 감춰진 신분>(이하 <위장자>)을 봐야 한다. <랑야방>을 만든 후홍량 사단의 작품으로(연출은 이설), 호가, 왕개, 근동이 그대로 역할만 바꿔 출연한다. <랑야방>을 하도 열심히 보았더니 <위장자>가 <랑야방> 인물들의 근현대 환생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위장자>에서 형들에게 시달린 명대(호가)가 불패의 책사 매장소로 화해 복수극을 펼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주역들의 변신 못지않게 <랑야방>에 출연한 배우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메뉴위치 : TV다시보기 > CJ E&M > NEW


다음은 중국에서 <랑야방> 못지 않게 화제였다는 <마이 선샤인>이다. 현대극 로맨스를 주로 제작하는 상하이극돈무화전매유한공사의 <마이 선샤인>은 대륙에 ‘억년수행남’ 열풍을 일으켰다. 남자 주인공 허이천(종한량)이 ‘억 년을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 남자라는 뜻이다. 여자주인공 자오모셩(당언)의 괴이한 머리 모양만 참을 수 있다면 <마이 선샤인>은 완벽한 연애물이다. 그렇게 뜨겁게 연애를 했는데 말없이 7년간 자신을 떠나 있던 자오모셩을 허이천은 포용한다. 차가운 도시 남자를 가장하지만 허이천은 실상 그냥 ‘자오모셩 바보’에 불과하다. 자오모셩의 오래 전 사진 뒤에 ‘My Sunshine’이라 적어두는 로맨틱함, 데이트를 할 것처럼 만나자더니 혼인신고를 위해 곧장 동사무소로 직행하는 추진력, 자오모셩이 벌이는 온갖 일들을 뒤에서 조용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박력, 먹고 싶다는 음식은 다 사주고 새우껍질을 까주는 다정함까지 전부 갖췄다. 과연 억 년은 수행해야 이런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거겠지. 

메뉴위치 : 영화/시리즈 > 시리즈 > 중화무협



익숙하지 않은 중국어의 장벽과 광전총국의 심한 검열 때문에 ‘입덕’이 어렵지만 한번 발을 들이고 나면 그 낯설고 호방한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만다. 패턴화된 플롯, 과장된 설정이 간혹 무리수를 내놓기도 하지만 중국의 현재와 마찬가지로 중국 드라마도 눈 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대륙은 역시 (덕후에게도) 기회의 땅이었다. 평범한 토요일을 보낼 줄 알았던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중드’의 세계에 입문하고 말았다. 이게 다, 종주님 때문이다.




* 위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

* 본 포스팅의 원본 글은 B tv 매거진 5월호(링크)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




Posted by SK브로드밴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aa105965?44999 BlogIcon 반가 2016.06.07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