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할 정도로 흥행한 영화가 있다. 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다. 지난해 대만에서 개봉했을 때는 대만 박스오피스를 갈아치웠고,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첫 소개됐을 때도 화제를 모았다. 영화제 상영 전 이미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영화를 본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알음알음 먼저 소문이 퍼지고, 국내에 정식 개봉해 흥행한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의 사례와 상당 히 비슷하다(<말할 수 없는 비밀>의 누적관객수는 9만 9106명이다). 두 작품 모두 청소년 시절의 첫사랑을 아련하게 그려냈다.
글 | 이화정·윤혜지
#왜 ‘대만’과 ‘청춘’인가
<5월 1일>(2016)
비슷한 유형의 대만영화들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남색대문>(2002), <영원한 여름>(2006), <청설>(2009),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 <점프 아쉰>(2011)…. 일련의 영화들엔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 교복 입은 학생들, 예민한 시선, 조심스럽고 섬세한 감정묘사, 주인공들의 말간 얼굴, 그리고 어떤 예쁜 것들. 그것이 주인공의 깨끗한 얼굴이든, 낭만적인 상황이든, 파릇파릇한 풍경이 든 대만의 청춘영화엔 반드시 ‘예쁜 것’이 있어야 한다.
<청설>(2009)
대만에서 이처럼 꾸준하게 ‘예쁜 청춘영화’가 제작·소비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대만 영화산업 안에서 청춘영화는 외화와 경쟁할 수 있을 만한 안정적인 상업영화 장르이자 특정한 관객 층과 팬덤을 지속적으로 형성해낼 수 있는 영역이다. 1970년대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치며 대만 정부는 자국 콘텐츠 개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자국영화 제작지원을 하고 검열도 완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광음적고사>(1982)와 <샌드위치맨>(1983)으로 촉발된 대만 뉴웨이브의 기수들인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 같은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담담한 현실 묘사, 사실적인 롱테이크 촬영, 동시녹음, 비전문배우의 적극적 기용 등을 통해 대만의 사회와 역사를 반추하는 예민한 시선의 걸작들이 이때 다수 탄생했다. 하지만 이들의 뒤를 이을 만한 인상적인 작가가 등장하지 않았고, 앞서 언급한 감독들은 대만 영화산업의 상업적 측면과는 무관했기에 대만의 자국영화 시장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이 후부터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시장을 잠식해 자국영화 제작환경은 더욱 위축됐고 소자본·소규모로 짧은 기간에 큰 위험 없이 제작할 수 있는 상업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졌다. 대만 영화산업은 긴 암중모색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소녀시대>
또한 청춘영화는 콘텐츠 구매력이 높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사이에 태어난 세대)가 무난히 선호할 만한 타입의 영화다. 대만의 밀레니얼 세대는 일본의 순정만화와 한국의 로맨스 드라마를 고루 즐겨온 데다 영화를 익숙한 엔터테인먼트로 받아들이고 있는 세대다. 또 대만은 아이돌이나 젊은 배우가 출연해 로맨스를 펼치는 ‘우상극(偶像剧)’이 주류 장르로 안착한 지 오래다. 대개 우상극의 남자주인공들은 (<나의 소녀시대>의 쉬타이 위처럼) 겉으론 차가워 보이지만 과거의 상처로 인해 잠시 변한 것 뿐이고 그 본질은 선하고 다정해 여자주인공의 헌신과 사랑에 힘 입어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는 인물들이다. 대만 우상극의 대표 캐릭터가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를 드라마화한 <유성화원>(2002) 의 따오밍스(언승욱)인데, <나의 소녀시대>에서 쉬타이위의 성인 역을 언승욱이 연기한 것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우상극이 드라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탓에 나이든 배우들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고, 대만의 경력 있는 배우들은 대개 중국으로 넘어가 활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소천왕’(대만의 사대천 왕) 금성무, 임지령, 오기륭, 소유붕과 현재 중국 본토에서 가장 활발히 드라마를 찍고 있는 배우 중 하나인 곽건화가 대표적 사례다. 젊은 배우는 많은데 나이든 배우가 없으니 자연히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자꾸만 청춘영화, 청춘드라마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안한 현실에서 미화되는 과거
현재 대만 청년들은 ‘22K 세대’라 불린다. 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처럼, 대졸 초임이 2만2천 대만달러(79만 원)에 불과한 청년세대를 일컫는 표현이다. 대만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 도 저조하고, 청년실업률은 나날이 치솟고 있다. ‘티끌 모아 티끌’이 라고 누가 말했던가. 돈을 모아봤자 풍요로운 미래가 오리란 보장이 없으니 눈앞의 작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겠다는 풍조가 한국 과 대만에 퍼지고 있다. 대만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신조어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널리 쓰이게 된 것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
그래서 청년들에겐, 우리에겐 망상이 필요하다. 현실에 대한 고민 없이 활기 넘치는 일상을 흘려보냈던 ‘그때 그 시절’이 그래서 그리운 것이다. 물론 그 시절이 실제로 존재했느냐는 중요치 않다. 지금 우리 머릿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돼 대리 만족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미망(未忘)은 그 자체로 청춘영화가 갖는 최고의 미덕이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주인공 린전신에겐 모든 환상이 실재한다. 안경만 벗어도 귀여워지는 외모, 우상처럼 따르는 ‘오빠’, 매너 좋은 남학우와 발랄하고 다정한 친구들, 사춘기 소녀의 ‘덕질’과 변덕스러운 마음까지 모두 이해해주는 잘생기고 똑똑한 첫사랑 남자애까지. 흥행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게다.
한겨울에도 영상 10도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 온난한 기후 덕에 대만의 풍광은 사시사철 푸르다. 비 가 자주, 많이 오기 때문에 날씨도 무척 변덕스럽다. 마치 십대 시절의 우리 마음처럼. 대만 청춘영화의 청량하고 치기 어린 인물들은 이런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산한 가을과 시린 겨울이 없는 대만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 이토록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나의 소녀시대>는 한국에서 개봉한 대만영화 중 최고 스코어를 기록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에서 상영됐는데, 그때 이미 한국 관객의 열기가 뜨겁다는 걸 느꼈다. 싱가포르에서는 그냥 웃고 좋 아한 정도였는데 한국에선 정말 감동받아서 눈물 흘리는 분도 있고, 반응이 좀 달랐다. 한국 관객이 대만에서 제작되는 첫사랑 멜로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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