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0. 18:48

20년, 30년 돌아 다시 만나는 영화들이다. 그 세월을 지나도 잊혀지지 않은 고전들이다. 고전이라니 지루하겠네, 생각했다간 충격받을 듯하다. 그 강렬함이 20년, 30년 가는 영화들이다.

글 | 김소민



#사랑할 수 없는 그녀 <피아니스트>

첫 장면으로 세게 따귀를 때린다. 가족이라는 폭력이 어떻게 개인을 속으로부터 파먹는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 뜯어 먹는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엉겨붙어 생존하는지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빈, 40대 피아노 교수 에리카(이자벨 위페르)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방에 못 들어가게 막는다. 어디 갔다 왔냐고 다그친다. 에리카의 가방을 낚아채 탈탈 털더니 원피스를 발견한다. “이럴 줄 알았지.” 어머니는 원피스를 낚아채 찢어버린다. 에리카는 조금만 늦어도 5분마다 전화를 해대는 어머니에겐 연습이 있다고 말하고 홀로 어딘가로 향한다. 포르노 영화방이다. 비디오를 고르고 쓰레기통에서 휴지를 찾아내 냄새를 맡는다. 때때로 남의 정사를 엿보거나 면도칼로 자해를 한다. 손에 장갑을 끼고 트렌치코트는 목까지 꼭꼭 잠근 그가 세상을 만나는 비틀린 순간,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침을 뱉는 순간들이다. 그는 그 ‘추한’ 순간에만 자기가 된다. 그런 에리카 앞에 금발의 젊은 공학도 발터(브느와 마지멜)가 나타난다. 


이 남자의 구애는 직구다. 에리카의 연주를 듣고 반했단다. 발터를 밀어내기만 하던 에리카는 그가 한 여학생에게 친절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는 그 여학생 코트 주머니에 깨진 유리를 쏟아 넣는다. 에리카의 마음을 확인한 발터가 다가오자 그녀가 내민 건 편지다. “내 팔다리를 묶고 내 얼굴을 세게 쳐주세요.” 이제 순한 발터의 얼굴이 변한다. 


당신은 에리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자기 학생의 미래를 파괴해버리는 여자,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것 말고는 사랑을 모르는 여자, 그녀는 추하다. 그럼에도 이자벨 위페르의 가로로 길게 앙다문 입술, 발터의 연주를 들을 때 아주 미묘하게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 멍한 눈에 3분의 1쯤만 차오른 습기를 보노라면, 바라게 된다. 이 여자, 사랑하게 해달라, 이 여자를 지옥에서 구해달라. 단언하건대 마지막 장면, 그녀를 아무리 혐오하더라도, 그녀의 고통이 그대로 당신의 심장을 찌를 거다.



#강렬하고 사랑스런 그녀 <베티블루 3 7. 2 디오리지널> 

벌써 30년이 지난 영화다. 그런데 빨간 원피스를 입은 베티(베아트리체 달)는 여 전히 선명하다. 원래 3시간 넘는 영화인데 1988년 국내에서 개봉할 때는 85분이 잘려나갔다. 청춘의 화인 같은 영화다. 37.2도는 남녀가 뜨겁게 사랑할 때 체온, 징글징글 파괴적이고 그래서 황홀한 사랑 이야기다. 1988년엔 아마 첫 장면부터 잘려나갔을 거다. 침대에 엉킨 베티와 조그, 37.2도가 그대로 스크린에 전달된다. 


서른 살의 작가 지망생 조그(장 위그 앙글라드) 앞에 야생의 베티가 나타난다. 해변 방갈로에서 살며 둘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베티는 무명작가 조그의 글에서 재능을 발견한다. 조그가 작가로 성공할 수만 있다면 자기 인생을 바쳐 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얼마나 쉽게 집착과 광기로 바뀌어버리나. 


황홀경 은 어떻게 그렇게도 쉽게 지옥도로 변해버리나. 순수하게 타올라 더 치명적이던 사랑은 두 사람을 삼켜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잘근잘근 씹히고 삼켜져버리는 고 통일지라도, 그 고통을 모르는 인생은 또 얼마나 허망한가. 큰 입에 약간 뻐드렁 니, 원색 원피스, 아마도 영화 역사상 가장 퇴폐적이고 순수한 캐릭터일 베티는 곧 베아트리체 달이다. 이 영화가 데뷔작인 베아트리체 달은 이후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베티를 뛰어넘지 못했다. 장 자끄 베넥스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과 가 브리엘 야레의 음악까지, 한번 보면 그 손아귀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든 영화다. 



#사랑이 무의미한 그녀 <세 가지 색: 블루> 

프랑스 국기 3색을 제목 삼아 자유, 평등, 박애를 그린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 스키 감독의 3부작 가운데 하나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유, 과거의 슬픔을 받아들여 얻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파랑은 자유인 동시에 넘실대는 슬픔이기도 하다. 


1993년 베니스국제영 화제 작품상, 여우주연상, 촬영상을 휩쓸었다. 줄리(줄리엣 비노쉬)는 한때 다 가진 여자처럼 보였다. 세계가 알아주는 작곡가 남편과 다섯 살 딸을 뒀다. 그들 은 줄리를 사랑했고 줄리도 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동차 사고로 한순간에 모든 게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울지 못하는 그녀 위로 시간은 지나간다. 집을 팔 고, 남편의 미완성 악보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홀로 아파트를 얻어도 그녀는 울 지 못한다. 다만 앙다문 입술로 손에 상처를 낸다. 그녀의 고통은 이게 끝이 아 니었다. 숨진 남편에게 애인이 있었고 그 애인은 임신 중이다. 슬픔이 어떻게 당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나. 사소 한 것에 구원의 실마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잡을지는 줄리 의 몫이다.


 줄리가 사는 연립 주민들이 서명을 모은다. 한 여자 를 내쫓기 위해서다. 그 여자가 밤마다 남자를 끌어들이는 ‘헤 픈’ 여자라는 거다. 줄리는 서명하지 않는다. 그 여자는 줄리가 절망과 공포에 질려 온통 푸른 물 속에서 몸부림칠 때 그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어준다. 올해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20주기다.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곳곳에서 회고전 이 열렸다. 때맞춰 ‘세 가지 색’ 시리즈도 국내에서 재개봉했다. 20년이 아니라 200년이 지나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 지 모른다. 진정,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두 발 로 땅을 딛고 뜨겁게 울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에 대한 감독의 쓸쓸하고 찬란한 답이다.



* 위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

* 본 포스팅의 원본 글은 B tv 매거진 9월호(링크)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



Posted by SK브로드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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