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0. 17:53

부산국제영화제 가려면 일단 부지런해야 한다. 빛의 속도로 매진이다. 같이 갈 사람 없으면 해운대에서커플 지옥을 경험해야 한다. 가서 보면 또 추억이지만, 못 가도 너무 씁쓸해 하지 말자. B tv가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감독들의 영화를 모았다.

글 | 김소민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

걸어도 걸어도>(2008)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 이어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보고 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선이 무뎌진 건 아닌가 싶을 수 있다. <걸어도 걸어도>에선 평범해 보이는 부자지간, 부부지간의 대화 안에 상처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잔인함이 있었다. 따뜻하지만 또 섬뜩한 것이 인간이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속 인간군상이 100% 선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인물들을 보는 감독의 시선이 따뜻하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배우만 보면 <걸어도 걸어도> 속편 같다. 


주인공 남자 배우(아베 히로시)와 그의 어머니(키키 키린)가 같다. 주인공 이름도 똑같이 료타다. 료타가 가족 안에서 뭔가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이번 료타는 훨씬 더 한심한 인간이다. 15년 전에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인데 그걸로 끝이다. 사설탐정사무소에서 불륜현장 염탐하며 근근이 먹고 산다. 번 돈은 도박으로 탕진한다. 이혼한 부인 교코(마키 요코)의 뒷조사도 하는데 아내한테 남자가 생기니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아내와 아들 싱고(요시지와 다이요), 모두 함께 살고 싶지만 말도 꺼낼 형편이 아니다. 이 가족이 료타의 어머니 요시코 집에 모이고 그날 태풍이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된다.


당신 인생은 얼마만큼 당신 자신의 것인가? 어린 시절 료타는 꿈을 물어보면 지방공무원이라고 답했다. 내기 경륜과 복권으로 돈을 탕진하는 자기 아버지가 싫어서였다. 그런데 아들에게 야구 글러브를 사주려던 돈을 도박으로 모두 잃는 사람이 지금의 그다. 흥신소에서 일하며 유부녀와 바람이 난 고교생에게서 뒷돈을 챙기는 그를 향해 고교생은 “당신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쏘아붙인다. “모두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깨가 쓸쓸하다.


자신마저 자신의 손 밖에 있다. 깨달음은 항상 늦다. 그럼에도 누가 당신의 삶이 의미 없다 말하겠나. <태풍이 지나가고>의 원제목은 등려군의 노래 가사에서 가져왔다. ‘바다보다 더 깊이.’ 어머니가 료타에게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바다보다 더 깊이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평생 한 번도 없었다. 보통 사람은 그런 경험 없을 거다. 그래도 살아가는 거다. 날마다 즐겁게.” “되고 싶은 어른이 못된 어른”의 이야기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따뜻한 것은 어쩌면 자전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어머니가 40년째 사는 아파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9살 때부터 20년 간 살았던 곳이다. 어린 시절 그는 태풍이 지나간 뒤에 미묘한 변화를 느꼈고, 그 변화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료타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싱고의 이야기와 겹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15년이 됐다. 살아 계실 땐 오히려 나랑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에 대해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그것들 중 어떤 부분들을 내가 나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에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뭔가를 건네주고 받는 게 아니겠나.” 그 애잔한 주고받음, 그 안에 들어있는 얼마간의 온기를 한참 들여다 본 영화가 <태풍이 지나가고>다.



# 지난해 갈라 프레젠테이션 상영작 <비거 스플래쉬>

틸다 스윈튼이 나온다. 감독은 이 배우와 <아이 엠 러브>(2009)를 만든 루카 구아다니노다. ‘냉무’해도 찾아보는 사람 있을 거라는데 돈 걸겠다. 마리안은 유명한 가수인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남자친구 폴(마티아스 쇼에나에츠)과 휴가를 떠난다. 곧 오랜 친구이자 마리안의 옛 연인인 해리(랄프 파인즈)가 알쏭달쏭한 매력이 있는 딸 페넬로페(다코타 존슨)과 함께 둘 앞에 나타난다. 이 넷 사이에 질투와 집착, 열등감과 욕망이 똬리를 튼다. 관객은 이들 사이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기승전결 고전적 이야기는 없다. 명확한 갈등도 없다. 아리송한 표정과 대사, 끼어드는 클로즈업, 관계 없어 보이는 파편들이 관객의 면전에 던져지는데, 그것들이 묵직한 불안의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이상한 흡인력을 지닌 영화다.



#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작 <초인>

제목이 거창하다. 니체의 초인사상에서 따왔다. 주인공들 대화 수준이 그렇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인용한다.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사람이면 다 초인이래. 그런데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그 고통을 견디고 극복하면 우리 삶은 변화가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게 된대.” 이게 다 여자 주인공 수현(채서진) 때문이다. 문학소녀다. 고교 체조선수 도현(김정현)은 싸움질한 벌로 도서관 봉사활동을 하다 책을 500권도 넘게 빌려본 수현을 만난다. 도현의 현실은 이렇다. 체조선생님은 대놓고“희망 이런 거 줄 수 없다, 그냥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 희망 없음에도 현재를 끌어안을 수 있을까? 수현과 도현은 서로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자 주인공 수준이 높아 머리 아플 것 같다면 걱정할 거 없다. 도현이 우리 편이다.



* 위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

* 본 포스팅의 원본 글은 B tv 매거진 10월호(링크)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

Posted by SK브로드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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