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루뚜뚜~ 뚜루뚜뚜~ 크랜베리스의 이 노래를 들은 요즘 사람들이라면 보통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노래는 내 인생 최애 오빠, 차태현을 떠오르게 하는 노래다. 때는 바야흐로 1995년, 저녁 식사를 하며 인기 연속극 <젊은이의 양지>를 보고 있던 나는 우연히 웬 귀엽고 풋풋한, 우유 냄새 풀풀 나는 한 남자 탤런트의 등장을 목격하게 된다. 전도연을 짝사랑하는 어느 젊은 대학생, 배역의 이름이 뭔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조연보다도 단역이라고 부르는 게 맞았을 그 대학생은 항상 뚜루뚜뚜~ 뚜루뚜뚜~ 하는 BGM과 함께 등장해 전도연과 수줍은 눈 맞춤을 하다가 전봇대 or 주차 중인 자동차에 쿵 부딪혀 전도연을 웃음 짓게 하는 대충 그런 역할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전도연 남친은 배용준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 대학생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지금 생각해보니 일자리 없는 공채 탤런트한테 역할 하나 준 거였나 싶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 신인 탤런트를 오로지 나 혼자 장면장면 나노 단위로 되새기며 끙끙 그리워했더랬다.
어언 21년 전,
초딩이었던 나는 그렇게 스무 살의 차태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 무명의 공채 탤런트, 톱스타로 거듭나다.
공채 탤런트로서 부르면 달려가 짠내나는 분량을 소화하던 무명 배우 차태현을 신분 상승시킨 작품은 누가 뭐래도 의학드라마 <해바라기>일 것이다. 아.. 귀여웠던 허재봉이…! (인턴이었는지 레지던트였는지 기억 안 나지만 어쨌든) 초보 의사 역을 맡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김정은과 콤비를 이루며 코믹 이미지 득템, 광고도 꽤나 많이 따내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햇빛 속으로>에서는 무려 메인 남주로 급부상!!! 멜로 연기까지 완벽하게 해내며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다(이 작품 이후로는 쭉- 메인 남주의 인생을 살아온 내 오빠♥)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핫한 스타들만 할 수 있다는 라디오 DJ 자리를 꿰차게 된다.
당시 내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영스트리트>나 <텐텐클럽>을 들었지만 나는 꿋꿋하고 당당했다. 어휴 <FM 인기가요>라니! 프로그램 타이틀부터가 10대 감성과 거리가 멀었고 DJ 초반엔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발진행이었지만(출연하는 게스트들마다 그가 행사 진행 톤으로 외치던 “네↗↘”를 따라 하며 놀려대던 게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본인도 이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불 킥을 하겠지?)
초보 DJ 시절을 빠심으로 버텨낸 나는 결국 막방까지 거의 다 챙겨 듣는 쾌거를 달성했고 사연을 보내 상품으로 토요일 고정코너였던 라이브 기념 씨디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막방 땐 라디오를 부여잡고 함께 통곡했다. 매일매일 안테나를 통해 소통하며 나의 덕심을 1단계 업그레이드시켜주었던 <차태현의 FM 인기가요>. 이를 통해 그의 매니저였던 신승환 씨는 연예인으로 거듭났고 라디오 하면서 쌓은 음악인들과의 인맥을 통해 앨범까지 내게 되었으니 그의 인생에 꽤 큰 영향을 끼친 경험이었을 거다.
■ 「해바라기」 보기 : TV다시보기 > MBC > 명작드라마
■ 「햇빛 속으로」 보기 : TV다시보기 > MBC > 명작드라마
# 차태현의 인생을 바꿔놓은 2001년
차태현 본인은 2001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배우였던 그가 가수로, 그것도 댄스가수로 데뷔해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를 기록하고 첫 영화 주연작 <엽기적인 그녀>로 왕대박을 터뜨렸던 2001년. 그냥 뭐, 뭘 해도 되던 때가 아니었을까? 이 시기는 나로선 ‘팬질’이라는 걸 본격적으로 결심한 시기이기도 한데 그동안 워크맨으로 테이프만 듣던 내가 처음으로 씨디를 샀고 그걸 듣기 위해 휴대용CDP를 샀다. 우리 반에 차태현의 1집을 산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 친구들이 신기한 듯 앨범 속지를 구경하다가 찢어먹어서 울면서 보관용 씨디를 하나 더 사기도 했었지(아련…) 그리고 무엇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팬클럽이란 걸 가입한 때이기도 하다.
가수로 데뷔를 했으니 클럽H.O.T.나 팬god 친구들처럼 풍선, 우비 같은 걸 받을 수 있을 줄 알고 가입했었는데 내 손에 들어온 건 팬클럽 이름이 대충 찍힌, 게다가 너무 커서 입을 수도 없는 새하얀 반팔 티 쪼가리 하나뿐이라 조금 화가 났던 기억이 나네... 아, 그리고 특별활동으로 영화감상반을 하면서 교실에서 본 영화들이 전부였던 내가 처음으로 영화관이라는 곳에 가서 돈 내고 티켓을 사서 본 영화가 <엽기적인 그녀>이기도. 이 정도면 꽤 의미 있는 팬질이 아닌가!!
어쨌든 가수로, 영화배우로 줄줄이 성공을 거두며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차태현.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높은 곳에 올라서였을까. 독수리 날갯짓 같았던 춤과 견우의 그늘 아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영화나 드라마로 이렇다 할 흥행 작품을 배출하지 못하며 그는 톱스타와 그냥 인기 스타의 경계를 오가는 시기를 보내게 되고 나는 TV 없는 기숙사에서의 여고 시절과 술 먹느라 바빴던 대학 시절을 보내며 잠시 휴덕기를 갖게 된다.
■ 「엽기적인 그녀」 보기 : 영화/시리즈 > 한국영화 > 코미디
# 괜찮아요. 예능이 있잖아요.
한동안 주춤하던 차태현의 진가는 의외로 예능에서 다시 부활했다. 2007년 초 출연했던 <무한도전>에서 그는 ‘하나마나송’을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냈고 2008년엔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해 차희빈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희대의 중상모략꾼으로 다시 태어났다.
다시 한 번 다져진 코믹 이미지는 영화의 성공을 끌어냈고 호불호 없는 호!호!호감 연예인, 믿고 보는 코믹 배우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1박2일 시즌2>를 거쳐 시즌3까지 성공시키며 2년 연속 연예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만능 엔터테이너로 거듭났다.
물론 차태현이 연예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을 때 차태현이 한 게 뭐가 있다고 대상이냐며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1박2일 시즌3>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차태현이 1박2일을 통해 보여준 예능감은 유호진이 만들고 싶어 하던 1박2일의 방향성과 같은 길을 걸어간다. 누군가 엉뚱한 말을 했을 때 면박을 주기보단 더 크게 웃어주고 자신의 활약을 나서서 드러내기보단 옆에 있는 멤버의 에피소드를 먼저 추켜세워주며 함께 잘해나가려는 따뜻한 리더십. 독설이나 비방을 일삼는 못된 캐릭터 하나 없이 다들 순둥순둥한 또라이들이 만들어가는 <1박2일 시즌3>는 그렇게 떠나갔던 시청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 「1박 2일 시즌3」 보기 : TV다시보기 > KBS > 예능
#그렇게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다.
평생 한 여자, 고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에 골인한 순정남. 지금도 종종 아내 용산댁과 집 앞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기울이는 국민 남편. 아이들과 시도 때도 없이 영상통화를 하며 쉬는 날이면 아내보다 더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친구 같은 아빠. 결혼한 후로는 관객들을 위해 멜로보다는 코믹, 가족 영화를 찍으려는 배려심(?) 넘치는 배우.
<과속스캔들>을 찍을 때 차태현은 당시 신인이었던 여배우 박보영의 얼굴 컨디션을 위해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 촬영은 항상 그녀 대신 본인이 도맡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소속사 분쟁을 겪은 후 다른 수많은 소속사에 외면당해 갈 곳을 잃었을 땐 매니지먼트를 담당해줄 지인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1박2일 새 시즌에 들어갈 때 김종민의 하차를 막은 것 역시 차태현이었다. 그는 시즌3를 제발 함께해달라는 유호진 PD의 부탁에 김종민과 함께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시즌3를 시청률 1위로 이끌었다.
지난해 연기대상 시상식에서의 수상소감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프로듀사> 제작 초반에 하차해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윤성호 감독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리고 쪽대본과 생방 촬영에 허덕이는 드라마 환경의 개선을 기원했다.
제작진들도 입 모아 말하는 늘 잘 챙겨주는 사람. 한 번 맺은 인연을 쉽게 놓지 않고 오랫동안 함께 가는 사람. 20대 초반 친해졌던 동갑내기 연예인들, 일명 ‘용띠 클럽’ 멤버들의 이름을 예능에서 자주 언급해주는 사람(예를 들면 홍경민이라거나 홍경민, 홍경민 같은 홍경민). 참 따뜻하고 좋은 사람…
팬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엽기적인그녀2>를 하게 된 것도 그렇다.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그는 자신을 영화배우로 자리 잡게 만들어 준 견우에 대한 책임감을 다했다. 더 늙기 전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기 전에, 견우를 다시 만났다. 2016년의 견우는 어떤 모습일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나는 또 이 영화를 보게 되겠지.
■ 「프로듀사」 보기 : TV다시보기 > 가나다찾기 > 파~하
# 거창한 타이틀은 없지만 그래도 할 만큼은 합니다.
21년 배우로서의 삶에 연기로 받은 상이라곤 <엽기적인 그녀> 시절 영화제 신인남우상 이후 작년에 받은 KBS 연기대상 우수연기상이 유일할 정도(인기상 제외)로 큰 타이틀이나 수상 경력이 참… 없다. <헬로우 고스트> 전까지는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 적도 없었고 필모그라피에 천만 영화도, 제작비 100억이 넘는 대작도 없지만, 그는 항상 행복하다고 말한다.
1박2일에서 지금까지 총 누적 관객 수가 몇 명 정도 되냐는 질문에 3,200만쯤 된다며 바로 대답할 줄 아는, 비록 한 방에 천만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작품을 봐준 관객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변에선 10년 넘게 너는 왜 변신을 안 하냐며 핀잔을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전라 노출을 선보인다거나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다거나 몸무게를 20kg 감량하는 등의 고난도 연기에 도전하는 대신 그는 남들이 외면하는 신인 감독의 작품, 소규모 제작비의 코미디 영화에 도전하며 영화 산업의 한 장르를 구축해간다.
■ 「헬로우 고스트」 보기 : 영화/시리즈 > 한국영화 > 코미디
남우주연상 없으면 어떠랴, 천만 영화 없으면 어떠랴. 그래도 관객들은 차태현이라는 배우를 사랑하고 <복면달호>를 제작했던 이경규의 말처럼 누군가에겐 꿈을 이뤄주는 고마운 배우일 테니! 자신의 위치와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고, 그 틀 안에서 적어도 본전은 해주는 사람. 이 정도면 나 역시 21년 덕후로서 OK다. (그러니 죽기 전에 한 번만 만나봤으면… 또륵…)
* 이 컨텐츠는 필진 '허아람'님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작성되었습니다.
SK브로드밴드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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